archive no.001

빅베이비

도엽의 생일

#일상 #달콤 #이벤트
CHARACTER
도엽
USER
은서
은서#01

구단에서 준비한 이도엽의 생일 이벤트와 어린이날 이벤트. 은서는 도엽 몰래 구장에 도착했다. 은서는 장난스레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도엽#02

잠실야구장의 어린이날은 뼛속까지 울리는 소란함으로 가득했다. 일반적인 홈 경기보다 한층 더 톤이 높은 소음. 당분에 취해 날뛰는 수천 명의 아이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콘크리트와 철골 사이로 튕겨 나갔고, 장내 스피커에서는 서른 살도 안 된 누군가가 고른 게 분명한 트렌디한 곡들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홈 팀 덕아웃 안, 모자챙을 깊게 눌러쓰고 웜업 점퍼의 지퍼를 반쯤 올린 도엽은 동전이라도 굴리듯 손가락 사이로 공을 돌렸다. 가죽이 손바닥에 부딪히며 나직한 소리를 냈다. 그라운드에서는 구단 MC가 무선 마이크를 잡고 “어린이날, 그리고 우리 에이스의 생일!”이라며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레일 위를 달리는 카메라가 난간을 스쳐 지나가며 도엽의 실루엣과 등번호, 그리고 내야를 향해 의무적으로 흔드는 무심한 손짓을 담아냈다. 주변 동료들은 늘 그렇듯 반쯤은 지루하고 반쯤은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성진이 도엽의 허벅지를 툭 치며 “우리 ‘빅 베이비’ 꼴 좀 보소”라며 낄낄거렸고, 준범은 “큰 애기! 큰 애기!”라며 유치원생 놀리듯 뒤에서 박자를 맞췄다. 하지만 그런 소란 속에서도 도엽의 몸은 선발 등판 직전의 낮고 익숙한 진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깨는 따뜻하게 예열됐고 고관절은 유연했으며 호흡은 일정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오늘 치러야 할 이닝별 과업이 정밀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구단은 작정하고 공휴일 분위기를 냈다. 외야 잔디에는 풍선 인형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고, 파울 지역은 분필로 그린 별과 사자 캐릭터들로 가득했다. 홈플레이트와 마운드 사이에는 간이 무대가 설치되어 사자 군단의 미니 유니폼을 입은 아이 셋이 마이크에 대고 “파이팅!”을 외치라고 설득당하는 중이었다. 마케팅팀의 누군가가 도엽의 생일을 이 이벤트에 쑤셔 넣기로 결정했는지, 전광판에는 그 아이들의 모습과 도엽의 지난 시즌 탈삼진 하이라이트 영상이 번갈아 나타났다. 촌스러운 서체의 숫자 ‘35’와 함께 ‘우리의 철옹성,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화면 상단을 가로질러 흘러갔다. 도엽은 마운드 방문을 맞이할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 민망함을 견뎌냈다. 턱을 치켜들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억지로 장단을 맞춰줘야 하는 남자의 가벼운 짜증 외에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눈빛이었다. 뭐든 상관없었다. 돈 받은 만큼은 해줘야지. 저들이 원하는 콘텐츠는 뽑아준 셈이다. 경기 시작 전에 얼굴에 케이크 크림만 처박지 않는다면야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소음과 색채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엽은 기대보다도 습관에 따라 관중석을 훑었다. 1루 라인 좌석, 오른쪽 어린이 구역, 사자 군단 서포터즈가 북을 두드리는 블록까지. 그러다 관중석의 한 형체에 시선이 닿는 순간, 일정하던 그의 맥박이 찰나의 박자를 놓쳤다. 흰 원피스 대신 청바지에 라이온즈 티셔츠 차림. 머리는 풀어 내렸고,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얼굴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휴대폰을 들어 올릴 때마다 반짝이는 결혼반지. 은서였다. 덕아웃 출입구 바로 위쪽 열에 앉아 아이들을 줌으로 당겨 찍으며 그라운드에는 별 관심 없는 척 연기하고 있었지만, 자꾸만 덕아웃 난간 쪽으로 튀어 오르는 시선이 그녀의 속내를 폭로하고 있었다. 온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아침 먹으면서 컨디션 좋을 때만 오라고, 억지로 관중석에서 고생하지 말라고 그토록 신신당부했건만. 그때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판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은서는 지금 누군가와 뒤에서 공모한 게 분명한,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마치 반응해 보라는 듯 도전적인 입매를 실룩이며.

도엽은 계단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공을 쥐는 법을 바꾸며, 그녀가 알아챌 때까지 시선을 고정했을 뿐이다. 마침내 눈이 마주치자, 카메라가 잡지 못할 사각지대에서 도엽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그들만의 은밀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역시나.” 도엽이 말이라기보다 한숨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왔네.” 옆에 있던 성진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반짝이는 반지를 낀 하얀 손이 이쪽을 향해 한 번 흔들리는 것을 포착하고는 씩 웃었다. “제수씨 오셨네.” 성진이 팔꿈치로 도엽의 옆구리를 툭 쳤다. “유부남 되고 첫 생일인데 설마 안 올 줄 알았냐? 너도 참 머리 안 돌아가요.” 도엽이 툴툴거리며 손안의 공을 멈춰 세웠다. 실밥을 꽉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실리자 가죽이 비명을 질렀다. “무릎 안 좋으니까 집에서 쉬라고 했더니, 이 찬 바닥에 다섯 시간이나 앉아 있겠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짜증에는 날이 없었다. 그저 구청에 다녀온 뒤로 가슴 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서툴고 밀도 높은 고마움이, 유니폼을 입은 채 그곳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전광판에는 지난 시즌 슬라이더를 던지는 도엽의 클로즈업 영상이 흐르다 돌연 덕아웃에 있는 그의 라이브 화면으로 전환됐다. 장내 MC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오늘의 생일 주인공, 우리 에이스 이도엽 선수!” 외야석의 아이들이 사탕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환호성을 내질렀다. 도엽은 눈을 한 번 굴리고는 감사하다는 뜻으로 해석될 법한 입 모양을 한 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중계 카메라가 줌을 당겼을 때, 렌즈보다 한 박자 더 높은 곳을 향하는 그의 시선이 포착됐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모자 아래서 어깨를 들썩이며, 이 모든 서커스 같은 상황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MC의 목소리가 경기장 조명보다 더 밝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 특별한 날을 맞아, 우리 빅 베이비 에이스를 위해 깜짝 손님을 모셨습니다!” 그 소리가 덕아웃에 떨어지자 도엽의 고개가 천천히, 그리고 서늘하게 성진을 향했다. “너 뭐 했냐.” 도엽이 낮게 읊조렸다. 성진은 두 손을 들고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정해, 등신아. 부모님 아니니까. 두 분은 전라도 집에서 보고 계셔. 그냥 봐.” 그라운드에서는 아이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구단 바람막이를 입은 스태프가 1루 터널 쪽에서 누군가를 급히 데려오고 있었다. 작고 익숙한 실루엣. 아까 입고 있던 티셔츠 위에 자기 몸보다 두 사이즈는 커 보이는 라이온즈 홈 유니폼 상의를 걸치고, 청바지에 운동화, 모자 아래로 묶어 올린 머리. 유니폼 뒷면에는 선수 이름 대신 ‘LEE 05’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도엽의 배번과 오늘 날짜를 의미하는 5번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파란색과 흰색 풍선 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마이크를 쥔 채였다. 덕아웃 거리에서도 은서의 미소가 낯선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할 때 나오는 그 특유의 경련 섞인 긴장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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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엽은 욕설인지 웃음인지 모를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게 그 공모의 실체였나. MC가 “에이스 선수의 아주 특별한 가족분”이라며 뜸을 들이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윽고 고가의 독일제 마이크를 타고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이도엽 선수… 아내… 주은서입니다.” ‘아내’라는 단어가 관중석에 설탕처럼 뿌려졌다. 성인 관중석에선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고, 오랫동안 도엽을 근처 여자들과 엮어대던 여고생 팬들은 비명을 질렀으며, 잔디 위의 아이들은 박수와 함께 풍선을 흔들었다. 덕아웃 안의 모든 머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 짓궂은 호기심을 담아 도엽을 향했다. 준범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와, 형수님 방송 탄다”라고 중얼거렸고, 선배 투수들은 도엽이 승리라도 챙긴 것처럼 등을 두드렸다. 도엽은 그 모든 반응을 무시했다. 그는 난간 앞으로 두 걸음 다가가 패딩 처리된 상단에 팔을 얹고, 떨리는 손으로 큐카드를 읽어 내려가는 무대 위의 작은 형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은서는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대본을 읽었다. 도엽이 어릴 적 자신의 영웅이었고, 다쳤을 때 곁에 있어 주었으며, 팀과 팬들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는, 구단에서 검수한 게 분명한 상투적인 멘트들이었다. 하지만 카드를 읽다 시선을 들어 올릴 때마다 그녀의 눈은 오직 도엽만을 향했다. 대본에 적힌 감사 인사 밑으로, 장내 스피커의 메아리 너머로 오직 도엽에게만 전달되는 은밀한 메시지가 그 반짝이는 장난기 속에 담겨 있었다. ‘나 왔어. 거짓말하고 왔어. 나 여기 있으니까, 아웃카운트 다 잡기 전까진 아무것도 못 할걸?’

[Time: 27/05/05(금), 17:12 | Loc: 잠실야구장 1루 덕아웃 & 그라운드 이벤트 무대 / 1루 관중석 | Outfit: (도엽) 홈 화이트 레나 라이온즈 유니폼 상·하, 네이비 모자, 워밍업 점퍼 / (주은서) 라이온즈 홈 유니폼 상의(등번호 05, LEE), 청바지, 스니커즈, 팀 모자, 결혼반지 | Pose: 덕아웃 난간에 팔뚝을 얹고 서서 손에 공을 쥔 채 경기 전 이벤트를 지켜보는 도엽; 홈플레이트 근처 간이 무대에서 풍선과 마이크를 들고 멘트 사이사이 도엽을 올려다보는, 장난기로 눈이 빛나는 은서 | Promise: 27/05/05(금), 17:20(잠실: 어린이날 & 생일 세리머니 종료), 27/05/05(금), 18:30(잠실: Bears전 선발 등판), 27/05/05(금), 22:30(서울: 경기 후 귀가 & 생일 저녁, ‘풀코스’) | Phase: OFF | Rank: 4위 | Games: 12승 8패/잔여124 | Schedule: 27/05/05(금) vs Bears | Away: 없음 | Home: 없음 | Situation: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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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03

은서는 마지막으로 콧잔등을 찡끗했다.
"세상 모든 어린이들을 위한 날, 어린이 여러분 모두 축하합니다. 그리고 우리 빅베이비도 축하해요. 라이온즈 가족 모두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눈웃음 지은 아진이 제 마이크를 관계자에게 넘겼다.

도엽#04

Approved

Response

"세상 모든 어린이들, 그리고 우리 '빅 베이비'에게도 축하를 전합니다."

마지막 멘트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부끄러움을 숨기려 할 때마다 그녀가 꺼내 드는, 그 특유의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수천 개의 막대풍선이 부딪치는 소리에 얹혀 악의 없이 시원스런 웃음바다가 경기장 전체를 휩쓸었다. 하지만 덕아웃에 있던 그에게 '빅 베이비'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무게로 날아와 꽂혔다. 갈비뼈 바로 아래를 명중당한 듯한 묵직한 타격감. MC의 대본이나 마케팅 팀의 얄팍한 상술이 아니라, 오롯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그의 이마에 도장을 쾅 찍어버리듯, 그녀는 앙증맞게 쐐기를 박았다. 눈을 반짝이고, 코를 찡긋거리며, 입꼬리를 유려하게 말아 올린 그 표정. 오늘 아침, 어둑한 아파트에서 풍겨오던 미역국 냄새를 배경으로 그의 배 위에 올라타 생일을 축하한다며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던 바로 그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 지극히 내밀한 모습과 지금 전광판에 비친 공식적인 모습이 이토록 완벽하게 겹쳐진다는 사실이 묘하게도 배덕한 기분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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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마지막 남은 긴장감마저 미련 없이 털어내듯 단호하고 가벼운 손짓으로 구단 직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라이온즈 윈드브레이커를 입은 직원이 꾸벅 인사하며 그녀를 1루 베이스라인 쪽으로 안내했다.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풍선 다발이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퐁퐁거리며 팔뚝에 부딪혔다. 센터 뒤편 대형 전광판을 채운 카메라는 유독 길게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구단 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의 클로즈업. 챙이 드리운 그늘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마저 감추진 못했다. 이윽고 뒷모습으로 리플레이 화면이 전환되자, 유니폼 등에 새겨진 이름—LEE 05—이 화면 정중앙에 선명하게 박혔다.

"우리 에이스의 아름다운 아내, 이 사모님께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분위기를 한껏 띄우려는 MC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학부모들이 박수를 쳤고, 아이들은 뜻 모를 함성을 질렀다. 십 대 소녀 팬 몇 명은 마치 아이돌을 영접한 듯 귀를 찢는 비명을 질러댔다. 곁눈질로 보니, 팀 동료 네 명이 마치 다음 쇼 코너라도 기대하듯 그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도엽은 그들에게 어떠한 반응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야구공의 실밥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손아귀에 꽉 힘을 주었을 뿐이다. 웜업 재킷 소매 아래로 굵직한 전완근이 꿈틀거렸다. 그의 시선은 단상에서 내려오는 자그마한 체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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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이 배정한 좌석으로 돌아가려면 그녀는 덕아웃 앞을 지나쳐야만 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1루 쪽 출구로 다가오는 그녀. 그 찰나의 순간, 둘 사이의 거리는 3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푹신한 펜스와 뜨겁게 달아오른 붉은 흙의 워닝 트랙만이 그들을 갈라놓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두 뺨은 쏟아지는 시선에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반달처럼 휘어진 눈꼬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풍선 줄을 쥐지 않은 빈손이 습관처럼 모자챙으로 향했다. 모자가 비뚤어지지 않았나 확인하는 그 작은 동작과 함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조명빛을 받아 서늘하고 날카롭게 번쩍였다. 그녀는 나른한 시선으로 유니폼을 입은 다른 선수들을 쓱 지나쳐 곧장 도엽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을 향해 허리를 숙여 작고 과장된 인사를 건넸다. 마이크 없이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봤어? 나 해냈어. 이 넓은 곳에서 다 들리게 말해버렸다고. 이제 어디 한번 도망쳐 보시지.

빌어먹을. 또다시 의지와 상관없이 입가에 경련하듯 미소가 번졌다. 도엽은 딱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카메라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짓 따윈 없었다. 그저 가까운 지인들만이 '아, 저 녀석 지금 무장해제됐네'라고 알아챌 법한, 미세하게 틀어진 작고 삐딱한 틈. 그는 손을 흔드는 수고 대신 턱을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심한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퉁명스럽다 못해 오만해 보일 정도로 간결한 동작이었다.

그녀가 허리를 펴자, 도엽은 시선을 툭 던지듯 덕아웃 위쪽 관중석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최소한의 몸짓으로 압축해 낸 명확한 지시. 가서 앉아. 마스코트처럼 서 있지 말고. 다리 쉬어.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벌어지며 은밀한 공모자 같은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들켰네. 이내 그녀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올랐다. 맨 앞줄 아이들이 풍선을 치려고 손을 뻗자 다발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누나! 풍선요!" "사모님!" 새액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걸음을 늦추지 않고 라이온즈 모자를 쓴 조그만 남자아이에게 풍선 줄 하나를 쥐여 주었다. 마치 차고 넘치는 여유를 나눠주는 것처럼, 무심결에 소품 하나를 툭 건네는 그 사소한 디테일이. 왠지 모르게 앞선 연설보다도 그의 가슴 속 더 깊은 곳에 눅진하게 내려앉았다.

등 뒤 덕아웃에서는 짓궂고 신난 조롱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야, 저것 좀 봐라. 우리 에이스 마누라가 본인보다 마이크 체질인데?"
성진이 짝짝 손뼉을 치며 낄낄거렸다. 시선은 중계 감독이 띄운 전광판의 분할 샷에 꽂혀 있었다. 단답형으로 뚝뚝 끊기던 도엽의 작년 경기 후 인터뷰 영상 옆으로, 방글방글 웃으며 말을 쏟아내는 오늘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앞으로 인터뷰는 무조건 제수씨 내보내자. 언론 대응은 포수 소관이니까 알아서 해."
도엽의 반대쪽 펜스에 몸을 기댄 준범이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처럼 히죽거렸다.
"형, 이제 진짜 빼박이에요. 아시죠? 전국 방송에서 아내분이 저렇게 쐐기를 박았는데. 물고기 키우는 독거남 코스프레는 이제 끝났다고요."
젊은 구원 투수 하나도 은근슬쩍 농담에 가세했다. "우리 빅 베이비 선배님, 장가가면서 팬클럽한테 제일 먼저 말도 안 해 주시고. 진짜 너무하셨네."

"시끄러워."
마침내 도엽이 입을 열었다. 신문지로 파리를 쫓듯 건조하고 덤덤한, 날 서지 않은 말투였다. 그는 손바닥 안에서 야구공을 한 번 굴리더니, 배트보이를 향해 가볍게 언더핸드로 툭 던졌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깜짝 놀란 배트보이가 하마터면 공을 떨어뜨릴 뻔했다. 도엽은 재킷 지퍼를 쥔 채 한 번에 쭉 끌어내렸다. 네이비색 천이 매끄럽게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그 아래로 단정하게 밀착된 홈 유니폼의 새하얀 핏. 높게 끌어올린 바지와 단단히 조여 맨 벨트. 나른한 오후의 열기 탓에 가슴팍에 새겨진 "LIONS" 로고가 벌써 땀으로 살짝 짙어져 있었다. 모자챙을 쥐고 다시 고쳐 쓸 때,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짧게 반짝였다. 그는 다시 한번 관중석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배정된 구역에 톡 튀어나온 그녀의 모자챙 꼭대기가 희미하게 보였다. 폰을 들여다보는 대신 필드를 향해 오롯이 고정된 하얗고 동그란 얼굴.
그래. 거기 앉아서. 똑똑히 지켜봐.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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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엽이 펜스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마운드에 오르는 날이면 으레 그렇듯, 넓은 어깨가 바짝 좁혀지며 한층 더 날카롭고 서늘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성진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가자. 불펜으로."
포수가 과장된 신음 소리를 내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정강이 보호대를 탁 차고 붙였다.
"예이, 알겠습니다요, 우리 빅 베이비."
성진이 둘만 들릴 정도로 작게 읊조리며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도엽의 양 어깨뼈 사이를 툭 내리쳤다. 오늘 아침, 요가 매트 위에서 은서의 엄지손가락이 꾹꾹 눌러주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던 바로 그 자리였다.
"마누라도 지켜보는데, 쪽팔리게 하지 마라."

두 사람이 덕아웃의 짧은 계단을 올랐다. 콘크리트 바닥에 스파이크가 부딪히며 탁, 탁,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우측 외야 불펜으로 이어지는 비좁은 터널로 진입하자, 경기장을 뒤흔들던 우레 같은 함성이 먹먹하고 묵직한 압박감으로 바뀌어 귓가를 맴돌았다. 걷던 와중 도엽의 손가락이 가볍게 구부러졌다 펴졌다. 오늘 아침 식탁 위에서 맞잡았던 그녀의 작고 뜨거운 손. '생일 용돈'이라며 폰 아래에 지폐를 밀어 넣어줄 때 그녀의 반지가 자신의 손마디를 누르던 그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머리 위 그라운드에서는 MC가 벌써 다음 스폰서 로고를 읊고 있었고, 베이스 러닝 시합을 위해 또 다른 꼬맹이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마지막 인사말의 여운만큼은, 이 콘크리트 벽을 타고 여전히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내 남편, 우리의 빅 베이비, 라이온즈 가족.
좋다. 온 경기장 사람들이 다 듣게 둬라. 모든 카메라가 그녀의 등에 박힌 저 유니폼의 이름을 찍어대게 둬라. 그의 오른팔이 온전히 버텨주고 제구가 예리하게 꽂히는 한. 오늘 하루가 누구의 날인지, 그리고 자신이 지금 마운드에서 대체 누구를 위해 공을 뿌리고 있는지 잠실벌의 모든 인간들이 똑똑히 알아도 상관없었다.

[Time: 27/05/05(금), 17:16 | Loc: 잠실야구장 1루 덕아웃 → 불펜, 그라운드 이벤트 무대 인근 | Outfit: (Do-yeop) 레나 라이온즈 홈 유니폼 상·하, 네이비 모자, 워밍업 점퍼 벗음, 결혼반지 / (Joo Eun-seo) 라이온즈 홈 유니폼 상의(LEE 05), 청바지, 스니커즈, 팀 모자, 결혼반지 | Pose: 덕아웃 펜스에 기대어 은서가 인사말을 마치고 풍선을 든 채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도엽, 은서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뒤 몸을 돌려 웜업 재킷을 벗고 성진과 함께 불펜으로 향하는 터널로 내려감; 직원의 안내를 받아 관중석으로 올라가며 풍선을 쥔 채 덕아웃 쪽을 한 번 뒤돌아보는 은서 | Promise: 27/05/05(금), 17:50(잠실: 불펜에서 투구 연습 시작), 27/05/05(금), 18:30(잠실: Bears전 선발 등판), 27/05/05(금), 22:30(서울: 경기 후 귀가 & 생일 ‘풀코스’ 저녁) | Phase: LIVE | Rank: 4위 | Games: 12승 8패/잔여124 | Schedule: 27/05/05(금) vs Bears | Away: 없음 | Home: 없음 | Situation: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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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05

경기가 무르익고 있다.

도엽#06

Approved

Response

8회초에 접어들 무렵, 잠실 야구장의 공기는 3시간을 넘긴 야간 경기 특유의 끈적하고 밀도 높은 질감으로 변해 있었다. 눈부신 서치라이트가 그라운드 위의 모든 색채를 강렬하게 짓눌렀고, 관중석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함성의 파도 속에서 넘실거렸다. 우측 전광판은 어둠 속에서 선명한 심판을 내리고 있었다. LIONS 3, BEARS 2. 8회초 2아웃, 주자 1, 2루. 그의 이름 옆에 선명한 붉은색으로 찍힌 투구 수는 112개였다. 아이들은 여전히 비명 같은 환호를 지르며 플라스틱 응원 배트를 두들겨 댔지만, 분위기는 이미 축제에서 갈증으로 변해 있었다. 수만 개의 폐는 마운드 위에 선 장신 투수에게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고 있었다. 90분 전 전광판에 생일 축하 메시지가 대대적으로 걸렸던 그 남자가 해야 할 일은 이제 단 하나로 압축되었다. 아웃 카운트 하나를 더 잡고, 리드를 지킨 채 마운드를 내려가는 것.

도엽은 잠시 투수판 뒤에 서서 공을 허벅지에 댄 채 숨을 골랐다. 하얀 홈 유니폼 아래로 가슴이 느릿하고 신중하게 오르내렸다. 그는 주변의 소음이 귓가에서 하나의 두툼한 띠처럼 압축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른쪽 어깨에서는 아직 관절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증거인, 깨끗하고도 지친 열기가 느껴졌다. 아직은 불길하고 지저분한 통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상태였다. 지난 7과 3분의 2이닝 동안 흙을 박차고 나간 탓에 스파이크 자국 주변에는 마른 흙이 낯설게 튀어 있었다. 모자챙이 눈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으나,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에는 평온함 따위는 없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힘줄이 툭 불거질 정도로 턱 근거리가 단단히 맞물려 있었고, 콧등의 작은 흉터는 땀에 젖은 피부 위로 하얗게 도드라졌다.

1루 측 덕아웃에서 베어스의 3번 타자가 육중한 연습 스윙을 한 번 휘두른 뒤 타석에 들어섰다. 그의 이름은 도엽의 머릿속에서 오래된 짜증의 매듭처럼 엉켜 있었다. 초구 실투를 놓치지 않는 파워 히터. 이미 4회에 담장을 맞히는 2루타를 뽑아냈던 놈이다. 성진은 15년 차 베테랑답게, 무릎의 통증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능청스럽고 탄력적인 동작으로 포수 미트를 벌리고 앉았다. 미트를 한 번 툭 치며 그가 사인을 보냈다. 검지와 중지가 낮게 움직이며 만드는 수순은, 오직 두 사람과 국내의 몇 안 되는 전력 분석원들만이 읽어낼 수 있는 암호였다. 몸쪽 패스트볼, 바깥쪽으로 흐르는 슬라이더, 따라오면 높은 쪽으로 하나 빼기.

가족석이 마련된 1루 라인 위쪽, 은서는 앞좌석 난간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등 뒤에 새겨진 'LEE 05' 마킹은 땀에 젖어 셔츠와 피부 사이에 쩍쩍 달라붙었다. 아까 나눠주지 못한 어린이날 풍선들이 발치에서 반쯤 바람이 빠진 채 게으른 곡선을 그리며 굴러다녔고, 열이 바뀔 때마다 버려진 팝콘 컵들을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은서의 눈에는 오직 60미터 밖의 마운드, 오른발을 투수판에 고정하고 왼발을 경사면에 가볍게 얹은 채 서 있는 남편뿐이었다.

중계 카메라조차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는 디테일들이 그녀의 눈에는 선명히 들어왔다. 투수판을 밟기 직전 옆구리에서 오른손을 한 번 쥐었다 펴는 습관, 실밥을 가로지르는 손가락 위로 전완근의 핏줄이 도드라지는 모습.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과녁을 좁혀가고 있다는 저 특유의 어깨 선. 그것은 몇 년 전 중환자실 의자에 앉아, 평평하게 그어진 모니터의 선이 다시 튀어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며 뚫어지게 응시하던 저주에 가까운 집중력이었다. 주변 아이들은 4회에 응원단장에게 배운 대로 여전히 "빅 베이비, 빅 베이비!"를 연호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을 때 그 소리는 거대한 함성의 돔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난간을 짚은 그녀의 반지가 금속 마찰음을 내며 한 번 탁 소리를 냈다. 그녀 자신의 몸이 내는 작은 타악기 소리였다.

마운드 위에서 그는 뒷발을 투수판에 대고, 이어 앞발을 맞춘 뒤 몸의 무게중심을 앞뒤로 한 번 흔들어 스파이크 끝에 걸리는 흙의 질감을 느꼈다. 성진의 타겟이 몸쪽 코너에 흔들림 없는 사각형을 그리며 고정되었다. 초구. 기선 제압이다. 벨트 위치에서 세트 포지션을 잡은 그는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 잠시 멈췄다가, 이내 Stadium 내 누구도 그의 이름을 모르던 시절부터 몸에 새겨온 부드럽고 간결한 폼으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팔이 좁고 빠르게 회전하며 뻗어 나왔고, 공은 포심 특유의 희미한 소음을 내며 마운드와 홈플레이트 사이의 공기층을 가르고 나갔다.

미트에 박히는 소리는 경쾌하고 정직했다. 허벅지 높이의 몸쪽 꽉 찬 코스. 타자가 욕심껏 휘두른 배트보다 훨씬 빨랐다. 포수 뒤의 주심은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스트라이크!" 장내 아나운서의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진 그 소리는 방송 오디오 특유의 무미건조한 외침으로 변해 야구장에 퍼졌고, 관중석의 소음은 다시 한번 거대한 날숨과 환호가 뒤섞인 괴성으로 바뀌었다. 도엽은 마운드 위에서 좁은 반원을 그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포수가 던져준 공을 글로브로 낚아챘다. 루상의 주자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초구 스트라이크. 기분 좋은 인내심이 바닥날 때면 제어할 수 없이 튀어나오는 버릇대로, 그가 무의식중에 마른 혀로 아랫니를 훑었다. 마스크 뒤에서 성진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그래, 빅 베이비. 이제야 좀 깼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같은 터널링으로 가자. 낙폭은 더 크게." 성진이 다시 쪼그려 앉으며 중얼거렸다. 마스크와 소음 속에 묻힐 혼잣말이었지만, 오랜 습관 덕분에 그 목소리는 마운드까지 선명히 전달되었다. 성진의 손가락이 정강이 보호대 사이에서 두 번 까딱였다. 슬라이더. 뒷발 쪽. 플레이트 밖으로. 도엽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공을 고쳐 쥐었다. 10년 전 연습장에서 주 코치가 전완근에 쥐가 나고 어깨가 얼음찜질을 애걸할 때까지 주입했던 그 익숙한 그립이 손가락 사이에 걸렸다. 순간, 주 코치의 얼굴이 떠올랐다. 속죄를 강요하는 석상이 아니라, 그의 머리에 모자를 꾹 눌러 씌우며 '이 공을 던질 거면 네 인생을 걸고 던져'라고 말하던 그 남자의 모습으로. 그 기억 바로 옆에는, 경기 전 잔디밭에서 자기 몸보다 큰 유니폼을 입고 전광판에 대고 당당하게 그를 남편이라 부르던 은서의 모습이 아무런 충돌 없이 자리 잡았다.

다시 다리를 들어 올린 그는 팔의 회전을 반 박자 더 늦췄고, 마지막 순간 손목을 비틀었다. 공은 방금 전의 패스트볼과 같은 궤적으로 출발하더니, 타자 앞에서 날카롭고 강하게 밑으로 꺾여 나갔다. 실밥이 공기를 긁으며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걸치고 떨어지는 찰나였다. 실투를 응징하려던 타자의 거대한 스윙은 허공만을 갈랐다. 두 번째 미트 소리는 훨씬 더 묵직했다. 성진은 심판이 판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도록 미트를 강하게 잡아챘고, 청색 유니폼의 주심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오른손을 내질렀다. "스트라이크!" 투 스트라이크.

경기장은 이제 함성을 넘어, 흥분한 아이들의 찢어지는 비명에 가까운 소음으로 가득 찼다. 1루 쪽 베어스 코치는 몸을 기울여 10분 전부터 몸을 풀고 있던 불펜 쪽을 힐끗거렸고, 라이온즈 덕아웃의 감독은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전광판의 투구 수와 마운드 위 도엽을 번갈아 살폈다. 전광판의 숫자가 선수의 몸 상태보다 우선일 리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는 도엽의 어깨 상태를 이 경기장 안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타자 한 명쯤은 더 상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성진이 글로브를 주먹으로 한 번 툭 치더니, 이번엔 바깥쪽 높은 코스에 타겟을 잡았다. 하이 패스트볼로 승부를 걸 생각이었다.

은서는 심장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물맛이 입안에서 비릿하게 맴돌았다. 오른쪽에서는 아홉 살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마가 의자 위에서 방방 뛰며 도엽의 이름을 리듬감 있게 연호하고 있었다. 왼쪽에서는 베어스 로고가 새겨진 선글라스를 쓴 아주머니 한 분이 누군가의 고모나 어머니인 듯 두 손을 모아 턱 밑에 대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하나만 더." 아주머니가 모두에게, 혹은 아무에게나 말을 건넸다. "하나만 더 잡자, 철옹성. 그래야 내려가서 케이크에 촛불이라도 켜지." 은서는 그 말이 너무나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정확해서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난간을 더 강하게 파고들었다. '딱 하나만 더. 그리고 집으로 와.'

그라운드 위, 도엽은 폐부 깊숙이 공기를 채웠다가 길고 절제된 날숨으로 뱉어내며 상체를 단단히 조였다. 오른쪽 전완근이 미세하게 저려왔지만, 그것은 붕괴의 전조가 아니라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있다는 익숙한 신호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게 가장 투박한 방식으로 명령했다.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직구 딱 하나만 더 던지자. 그럼 오늘 할 말은 다 끝나는 거야.' 사인이 왔고, 그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뿌렸다. 공은 벨트 높이에서 출발해 가슴팍까지 떠오르며 바깥쪽으로 흘렀다. 타자라면 누구나 건드리고 싶으면서도 결국 후회하게 되는 코스. 앞선 공에 분노가 섞인 타자는 참지 못했다. 단두대의 칼날처럼 거칠고 늦은 스윙이 존을 통과했다.

타격음은 실투를 때리는 경쾌한 파열음이 아니었다. 나무가 공 윗부분을 얇고 추하게 핥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공은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서치라이트 속으로 파고든 높고 회전이 심한 팝플라이가 허공에 머무는 1초의 시간은 영겁처럼 길었다. 1루 라인의 모든 아이가 고개를 젖혀 하얀 점을 쫓았다. 성진은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공의 궤적을 쫓아 몸을 틀었다. 기류를 타고 흔들리던 공이 1루와 홈 사이 파울 지역으로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미 1루수가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공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 압축된 시간 속에서, 야구장의 소음은 마치 다른 세상 일처럼 멀어졌다. 도엽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늘을 향해 펼쳐진 팀원의 글러브, 그리고 곁눈질로 보이는 가족석의 낯익은 모자 실루엣뿐이었다. 강렬한 조명 아래서 형체는 흐릿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몸쪽 꽉 찬 과녁보다 더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이 아웃 카운트가 자신의 기록이나 생일 방어율, 혹은 훗날 하이라이트 영상에 어떤 의미가 될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생이 그에게 허락한 좁은 길목에서, 순간은 플린칭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 단순하게 깎여 나갔다. '리드를 지키고, 내 발로 마운드를 내려가자. 그래서 오늘 밤 집에 돌아가 문을 열었을 때, 3만 명 앞에서 나를 빅 베이비라고 불러준 저 사람이 내 얼굴에서 제 몫을 다한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자.'

[Time: 27/05/05(금), 21:17 | Loc: 잠실야구장 마운드 & 1루 관중석 | Outfit: (도엽) Lena Lions 홈 유니폼 상·하, 네이비 모자, 결혼반지 / (주은서) LIONS 홈 유니폼 상의(LEE 05), 청바지, 스니커즈, 팀 모자, 결혼반지 | Pose: 8회초 마운드 위 도엽, 경기 클라이맥스 상황에서 2아웃 주자 상황을 극복하고 하이 팝플라이를 유도한 직후; 은서가 가족석 난간에 기대어 도엽을 주시하고 있으며 발치에는 풍선들이 흩어져 있음 | Promise: 27/05/05(금), 22:30(서울 자택: 경기 후 귀가 & 생일 풀코스 저녁), 27/05/06(토), 11:00(서울: 개인 컨디셔닝 & 재활 루틴) | Phase: LIVE | Rank: 4위 | Games: 12승 8패/잔여124 | Schedule: 27/05/06(토) vs Bears | Away: Bears 2 | Home: Lions 3 | Situation: 8회초 / 0B 0S 2O / 주자1,2루, 타구: 포수 뒤 파울 플라이 낙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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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07

은서는 두 손을 모았다가 환호했다.

도엽#08

승인됨

응답

하얗게 쏟아지는 조명 속으로 하얀 동전 같은 공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중력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공이 추락하자, 관중석에서는 단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제발 그 가죽 장갑 안으로 빨려 들어가라는, 수만 명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날것의 소음이었다. 가족석에 앉은 은서는 턱밑에서 두 손을 깍지 끼고 기도를 올리듯 손가락을 꽉 맞물렸다.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준 그녀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며 전신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등 뒤에 새겨진 'LEE 05'라는 글자가 그녀의 어깨짓을 따라 거세게 흔들렸다.

아래층 경기장, 1루수는 파울 라인과 온덱 서클 사이의 좁은 파울 플라이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이마 높이로 글러브를 치켜든 그의 시선은 단 한 순간도 공을 놓치지 않았다. 공은 마치 목적지를 고민하듯 허공에서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퍽' 하는 둔탁하고도 깔끔한 소리와 함께 글러브 웹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야수들만이 들을 수 있는 그 은밀한 수확의 소리. 심판이 허공을 향해 단호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아웃.

그 오른팔의 짧고 강렬한 움직임 하나로 이닝이 종료되었다. 루상의 주자들은 그대로 묶였고, 베어스의 덕아웃은 처진 어깨와 내팽개쳐진 헬멧들로 가득 차며 순식간에 활기를 잃었다. 반면 라이온즈 쪽은 열 살짜리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성인 남성들의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누군가 대신 그 고된 짐을 짊어지고 해결해 주었을 때 터져 나오는, 안도와 희열이 뒤섞인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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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엽은 방방 뛰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런 건 그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 표현이었다. 그는 그저 어깨의 긴장을 살짝 풀며 2센티미터쯤 낮췄을 뿐이다. 아주 미세한 해방감. 옆구리 쪽에 내린 오른손을 한 번 꽉 쥐자 마디가 반 초 정도 하얗게 일어났다가 이내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마운드 뒤편으로 걸어 내려오는 그의 호흡은 여전히 일정했다. 내려오는 길에 발끝으로 마운드 경사면을 습관적으로 다듬는 발짓도 잊지 않았다. 투구 팔의 관절에는 마치 뜨거운 모래를 부어 넣은 듯 묵직하고 까끌거리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팔은 여전히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파울 라인을 향해 걸어가던 도엽은 1루수를 향해 턱을 한 번 까닥였다. '나이스 캐치, 내가 원하던 공이었어.'라는 의미가 담긴 최소한의 인사였다. 그리고 생일조차 꺾지 못하는 뿌리 깊은 절제와 습관에 따라, 그는 딱 한 번 시선을 위로 던졌다. 덕아웃 지붕 너머, 이미 그녀가 있을 곳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은서는 도엽의 주변 시야가 그려둔 지도 정중앙에 정확히 서 있었다. 가족석 난간 너머로 몸을 내민 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모습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기도하는 성자처럼 보였을 법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체면 따위는 던져버린 채 소리를 지르던 은서는, 포구 직후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도엽을 찾아내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경기장의 나머지 풍경은 전부 암전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과 눈이 마주친 걸 확인하자마자 은서의 얼굴에 가식 없는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평소 유지하던 우아함 따위는 개나 줬다는 듯한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그녀는 난간을 붙잡고 있던 손 하나를 거칠게 휘둘러 허공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조명 아래에서 그녀의 결혼반지가 반짝하고 빛을 튕겨냈다.

'됐어.'

함성 소리 너머 어딘가에서 도엽은 생각했다. 뱃속 깊은 곳에서 딱딱하고도 만족스러운 무언가가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봤다.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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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아웃 내부의 소음은 관중석의 포효와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훨씬 거칠고 날카로운 환대였다.

"나이스, 빅 베이비!"

도엽이 덕아웃 계단을 밟기도 전에 성진이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이미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도엽의 견갑골 사이를 손바닥으로 퍽 소리 나게 내리쳤다. 마스크도 벗지 않은 포수의 입가에 하얀 이빨이 드러나며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야, 너 어린이날 광고라도 찍으려고 완투까지 하려 그러냐? 아니면 9회는 불펜 애들 밥값 좀 하게 양보해 줄 거야?"

그들 뒤에서 누군가 수건으로 난간 패딩을 찰싹 내리쳤다. 다른 투수 하나가 "저게 우리 에이스지! 서른다섯은 그냥 숫자라니까!"라고 소리쳤다. 안도한 남자들이 모든 결과가 필연적이었던 양 너스레를 떨 때 내는 특유의 말투였다.

도엽은 길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감독이 손을 내밀며 다가오자,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공을 건넸다. 몇 년 전의 도엽이었다면 고집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자폭에 가까운 자존심 때문에 남은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우겼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그의 몸이 내린 판결은 명확했고, 이제 그의 왼손에는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책임감이 묶여 있었다.

"수고했다."

감독의 짧은 격려와 함께 공이 그의 손바닥 안으로 사라졌다.

"8이닝이면 충분해. 9회는 애들한테 맡기자고."

도엽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시선은 이미 마무리 투수가 가벼운 뜽금질을 시작한 불펜 쪽을 향해 있었다. 그는 덕아웃의 서늘한 그늘 속으로 몸을 낮추어 들어갔다. 얼굴을 달구던 열기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방망이 거치대 근처, 커다란 공업용 선풍기가 미지근한 바람을 뿜어내는 끝자락에 도엽이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다가온 트레이너가 어깨에 점퍼를 걸쳐주고 손에는 하얀 수건을 쥐여주었다.

"팔은?"

트레이너가 도엽의 팔꿈치를 살피며 나직하게 물었다.

"붙어는 있습니다."

무심한 대답과 함께 도엽은 수건으로 팔뚝을 짧고 효율적으로 문질러 닦았다. 땀이 식어 근육이 굳어버리기 전에 미리 수분을 걷어내는 익숙한 몸짓이었다. 전광판에는 그의 오늘 성적이 타협 없는 숫자로 깜빡이고 있었다.

'8.0이닝, 6피안타, 2자책, 1볼넷, 9탈삼진, 투구 수 119개.'

장내 아나운서가 이 기록을 축제 분위기의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방금까지 벌인 처절한 사투라기보다는 무슨 역사적인 유물이라도 소개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하지만 도엽에게 이 숫자의 의미는 단 하나였다. 혐오감 없이 이 무대를 내려올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

중계 카메라가 벤치에 앉은 그를 비추자 관중석에서 정중하던 박수 소리가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도엽은 턱을 굳게 다문 채 무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감독이 화면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아주 살짝 까닥였다. 인사를 하는 것도, 고개를 숙이는 것도 아닌, 마운드에서 은서에게 보냈던 것과 비슷한 절제된 끄덕임이었다.

전광판 화면이 교차하며 상단 가족석에 있는 은서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세차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등 뒤의 'LEE'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 뒷줄에 앉은 누군가가 손가락질하며 속닥거리는 모습도 포착됐다. 아마 '철옹성 사모님'이라는 태그를 달아 인스타 스토리라도 올리고 있을 터였다. 도엽은 전광판을 향해 웃어주지는 않았지만, 벤치 동료들만 겨우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스쳤다.

8회 말 공격이 시작되었다. 선두 타자의 안타, 주자를 진루시키는 희생 번트, 그리고 담장 앞에서 잡히는 큼지막한 외야 플라이까지. 도엽은 점퍼 지퍼를 반쯤 올린 채, 팔꿈치에 아이싱을 감고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녹아내린 얼음물이 팔뚝을 타고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렸다. 자신의 일이 끝난 뒤의 경기를 지켜보는 그의 눈에는 분석적인 지루함이 서려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투구 선택에서 다음 상황에 대한 대비책으로 기어를 바꾼 상태였다. 여기서 한 점만 더 내면 마무리가 편해질 것이고, 만약 추가점 없이 이대로 끝난다면 9회는 상대의 첫 타석부터 불꽃이 튈 터였다.

장비를 벗고 후드티로 갈아입은 성진이 스포츠음료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좀 행복하냐?"

성진이 다짜고짜 물었다.

"어린이날에 8이닝 던지고, 생일 주인공에, 마누라는 관중석에서 응원하고, 평균자책점 예쁘게 뽑았고, 팔뚝도 안 떨어져 나갔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또 투덜거릴 거냐, 아니면 정상적인 인간답게 그냥 이 승리를 만끽할 거냐?"

도엽은 3-2로 팽팽하게 멈춰선 전광판을 바라보며 짧게 콧방귀를 꼈다.

"마무리가 블론 세이브 저지르면 이딴 건 다 아무 의미 없어. 그리고 그 공 받아야 하는 건 너야."

"에라이, 그래 그래. 이기면 투수 덕이고 지면 포수 탓이지, 내 팔자야. 아, 그리고 너네 마누라가 마이크 대고 한 말 잊지 마라. 경기장 사람들 다 들었어. 너보고 '빅 베이비'라던데? 이제 네 별명은 그거야. 설사 역전패당해도 넌 집에 가서 얌전히 마누라 가방 들어주고 케이크나 먹어야 된다고."

'아내'라는 단어는 여전히 도엽의 가슴 한구석에서 생경한 무게감을 만들어냈다. 누군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잘 길든 글러브 포켓에 공이 '퍽' 하고 박힐 때처럼 둔탁하고 기분 좋은 울림이 전해졌다.

"시끄러워. 경기나 봐."

도엽이 대꾸했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기운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남들 앞에서는 차마 인정하기 싫은, 만족감에 가까운 무언가가 그의 감정을 매끄럽게 다듬어 놓았다. 도엽은 다시 한번 은서가 있을 위층 관람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각도에서는 그녀를 찾아낼 수 없었지만, 그저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마무리 투수의 등장곡이 쿵쾅거리며 울려 퍼지고, 마운드를 향해 달려가는 투수의 모습과 함께 잠실구장의 소란스러운 풍경 속에서 9회라는 마지막 막이 오르고 있었다.

[Time: 27/05/05(금), 21:19 | Loc: 잠실야구장 홈 덕아웃 & 1루 관중석 | Outfit: (도엽) Lena Lions 홈 유니폼 상·하, 네이비 모자, 워밍업 점퍼 걸침, 결혼반지 / (주은서) LIONS 홈 유니폼 상의(LEE 05), 청바지, 스니커즈, 팀 모자, 결혼반지 | Pose: 내야 팝플라이 유도 후 마운드 내려오는 도엽, 감독과 공 주고받은 뒤 덕아웃 끝에서 팔꿈치 아이싱하고 점퍼 걸친 채 경기 지켜봄; 가족석에서 난간 붙잡고 기도하다가 열렬히 환호하는 은서 | Promise: 27/05/05(금), 21:45(잠실: 경기 종료 예정), 27/05/05(금), 22:30(서울 자택: 경기 후 귀가 & 생일 풀코스 저녁), 27/05/06(토), 11:00(서울: 개인 컨디셔닝 & 재활 루틴) | Phase: LIVE | Rank: 4위 | Games: 12승 8패/잔여124 | Schedule: 27/05/06(토) vs Bears | Away: Bears 2 | Home: Lions 3 | Situation: 8회말 / 0B 0S 0O / 주자None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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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09

경기 종료 후 은서가 선수 대기실 쪽으로 향하다가 성진을 마주쳤다.
"성진오빠!"
눈웃음을 지은 은서가 킥킥 웃었다.
"무릎은 괜찮아요?"

도엽#10

경기장 밖 복도에는 여전히 열기가 가득했다. 관중석의 함성이 콘크리트 벽과 배관을 타고 내려와 먹먹한 울림으로 진동하고, 천장의 형광등은 낡은 리놀륨 바닥 위로 서늘한 백색광을 쏟아냈다. 오렌지색 조끼를 입은 보안 요원들과 팔뚝보다 두꺼운 팸플릿을 쥔 아이들이 뒤섞인 인파 사이로 은서가 나타났다. ‘LEE 05’가 새겨진 유니폼을 청바지 위로 헐렁하게 걸친 채, 은서는 반쯤 뛰고 반쯤 절뚝거리며 경사로를 내려왔다. 8이닝 동안 이어진 팽팽한 혈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손목에 매달린 풍선들이 바보같이 흔들렸고, 뒤로 눌러쓴 모자 아래로는 붉게 상기된 뺨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반대편에서 남색 후드 집업을 걸치고 마스크를 한쪽 귀에 걸친 성진이 걸어오자, 은서의 얼굴이 마치 공짜 솜사탕을 발견한 아이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은서는 소란스러운 소음 너머로 그의 이름을 날카롭게 부르더니, 마지막 몇 걸음은 미끄러지듯 다가와 눈이 없어질 정도로 활짝 웃어 보였다. “성진오빠! 무릎은 괜찮아요?”

성진은 대답을 고르기도 전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은서의 작은 몸이 거의 가슴팍에 부딪히기 직전 멈춰 섰고, 성진은 마치 덕아웃에서 너무 빨리 튀어 나가는 신인을 붙잡듯 자연스럽게 은서의 팔뚝을 잡아 중심을 잡아주었다. “내 무릎?” 성진이 눈썹을 치켜뜨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이보세요, 이 사모님. 나 방금 8이닝 동안 쪼그려 앉아 있다가 내 발로 걸어 나온 사람이야. 난 멀쩡해. 너나 좀 봐라.” 성진의 시선이 은서의 다리로 향했다. 재활의 모든 단계를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세심한 관찰이었다. 지난가을보다 움직임은 훨씬 좋아졌고 절뚝거림도 거의 사라졌지만, 갑자기 멈춰 설 때면 여전히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성진은 훈계하듯 은서의 무릎 바로 위 허벅지를 손등으로 가볍게 툭 쳤다. “너 경기 내내 거기 서 있었지? 소리 지르고, 방방 뛰고, 홍보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풍선 나눠주면서 말이야. 내가 걱정되는 건 그쪽 무릎이거든. 안 아파?” 거짓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성진은 데님 너머로 무릎 관절 안쪽을 부드럽게 눌러보았다. 마치 투수의 팔뚝 근육 상태를 살피듯 텐션을 읽어내는 손길이었다. 은서의 킥킥거림이 찰나의 순간 잦아들더니, 이내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더 크게 터져 나왔다. 성진은 코웃음을 치며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 눈빛에는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그럼 그렇지. 집에서는 우리 에이스를 들들 볶고, 마이크 잡고는 기를 죽여놓더니, 본인은 무슨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척을 하고 있어. 진짜 못 말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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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을 마친 성진이 경기장 쪽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그나저나 아까 그 자기소개 말이야.” 성진은 은서의 밝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얼굴 옆에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이도엽 선수의 아내 주은서입니다.’ 너 아주 사람을 죽이더라. 덕아웃에 있던 네 남편 표정, 나 은퇴할 때까지 못 잊을 거야.” 성진이 낮게 깔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3만 명 앞에서 ‘빅 베이비’라고 부르다니, 배짱 한번 두둑해, 이 사모님. 팬클럽에서는 벌써 ‘도엽이가 팀 거냐 네 거냐’로 키보드 배틀 붙었을걸?” 아니나 다를까,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은 10대 팬 몇 명이 급히 지나가다 전광판에서 본 은서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헐, 진짜 이 사모님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질겁한 부모에게 끌려가는 팬들을 향해 성진이 게으르게 손가락 두 개를 펴 인사를 건네더니, 은서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어 인파가 드문 옆길로 이끌었다. 선수 대기실과 전용 출입구로 이어지는 복도였다. “자, 오늘의 주인공은 이쪽입니다. 여기 더 있다가는 어린이날 굿즈 광고까지 찍으라고 붙잡힐지도 몰라.”

“남편분은 인터뷰 마무리 중이야.” 성진이 앞쪽의 무거운 문을 곁눈질하며 조금 더 사무적인 말투로 덧붙였다. 문 근처에는 낙오된 선수라도 기다리는지 기자 한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나오면 분명히 툴툴거릴 테니까, 딱 30초 동안만 이 평화를 즐겨둬.” 성진이 삼촌 같은 거친 애정을 담아 은서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 도엽이 진짜 짐승처럼 던지더라.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겠지만 어깨는 불타는 중일 거야. 집에 가서도 강한 척하게 내버려 두지 마. 아이싱도 좀 시키고, 마사지도 해주고. 너희 그 비싼 우루스 안에서 커튼 치고 하는 거 있잖아, 그런 거 다 해줘.” 성진이 말을 멈추더니 장난기 어린 눈으로 은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침에 큰소리쳤던 그 ‘풀코스’ 말인데, 나한테 구체적으로 설명할 생각은 하지 마라.” 은서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눈이 동그래지자 성진이 껄껄 웃었다. 은서가 성진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찰싹 때렸지만 성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걔가 나한테 말 안 할 것 같아?” 성진이 연극하듯 목소리를 낮추며 은서에게 바짝 다가갔다. “내가 걔 입에서 ‘너 만지고 싶다’는 소리가 안 나오게 참는 걸 1년 반 동안이나 지켜봤다고. 그게 얼마나 정신적 고문인 줄 알아? 이제야 유부남 노릇 제대로 하는 것 같으니까, 경기장만 벗어나면 난 공식적으로 눈 감고 귀 닫을 생각이야. 알겠지?”

옆에 있던 선수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신인 외야수 한 명이 비좁은 틈으로 빠져나왔다. 복도에 서 있는 이들을 발견한 신인이 허리를 굽혀 급하게 인사하며 사라졌다. 그 뒤로, 눈부신 조명 아래 마치 거대한 기념비처럼 도엽이 서 있었다. 흰색 홈 유니폼 하의 위로 회색 트레이닝복과 남색 웜업 재킷을 걸친 차림이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져 이마가 훤히 드러났고, 한 손에는 모자를, 가슴팍에는 장비 가방 끈을 대각선으로 메고 있었다. 그을린 피부와 대조되는 하얀 스포츠 테이핑이 손가락 하나에 여전히 감겨 있었고, 팔꿈치에는 방금까지 아이싱 팩을 조여맸던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바닥을 응시하며 걷던 도엽의 시선이 들어 올려지더니 성진을 거쳐, 포수의 팔 아래 쏙 들어가 있는 작은 실루엣에 멈췄다. 그 순간 도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짜증이라기보다는 노골적인 소유욕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도엽은 서두르지 않았지만 망설임도 없이 걸어왔다. 유니폼 차림의 그를 위해 인파가 자연스럽게 갈라졌고, 그는 은서가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눈을 맞출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본 도엽의 헤어라인에는 옅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난 뒤의 휑한 눈 밑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기쁜 내색을 감추려 할 때 나타나는 특유의 입매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도엽이 성진을 곁눈질하며 짧게 내뱉었다. “내 마누라랑 바람 다 잡았냐?” 목소리는 낮고 무미건조했지만, ‘내 마누라’라는 단어에 실린 무게감은 주변 공기를 압도했다. 성진이 껄껄 웃으며 은서의 어깨에서 팔을 떼고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거봐, 툴툴거린다니까.” 성진이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난 가볼 테니까 둘이 오붓하게 있어라. 야, 빅 베이비. 집에 가서 스트레칭 잊지 말고. 침대에서만 하지 말고.” 도엽이 들고 있던 모자로 성진의 뒤통수를 툭 후려쳤다. 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은 손길이었다. 성진은 여전히 웃음을 터뜨리며 문 안쪽으로 사라졌고, 준범을 향해 쏟아내는 그의 걸걸한 입담이 복도까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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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조용해진 복도에서 도엽의 시선이 오롯이 은서에게 향했다. 단둘만 남게 되자 도엽의 어깨에서 긴장이 한 풀 꺾였다. 아이싱 때문에 여전히 차가운 도엽의 커다란 손이 은서의 턱 끝을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모자 짓눌린 자국을 따라 이마에 맺힌 땀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집에서 쉬라고 했을 텐데.” 질문이라기보다는 나직한 읊조림에 가까웠다. “올 거면 말을 하든가.” 도엽의 시선이 은서의 무릎으로 잠시 내려갔다 돌아왔다. “내내 서 있었어?” 대답도 듣지 않고 도엽은 손을 내려 은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다리의 측면 상태를 살피려는 듯 은서의 몸을 살짝 돌렸다. 신체를 데이터처럼 읽어내는 운동선수의 직업병이었다. “통증은?”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은서를 만지는 손길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성진이 아까 확인했던 것과 똑같은 자리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한때 자신의 밤을 괴롭혔던 그 특유의 뻣뻣함이 느껴지지 않는지 살폈다.

은서가 예상대로 “괜찮아, 나 다 컸어”라며 씩씩하게 대답하자, 도엽은 어이없다는 듯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고집은.” 그러고는 마침내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마스코트처럼 서서 사람 다 보는 앞에서 ‘빅 베이비’라고 부르기나 하고.” 도엽의 엄지손가락이 위로 올라가 갈비뼈 근처에 걸린 유니폼 끝자락을 건드렸다. “재미 좀 봤나 보지?” 굳이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아까 그라운드 위에서 반짝이던 은서의 눈동자가 이미 답을 해줬으니까. 도엽은 체념 섞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했어.” 농담기 없는 진심 어린 칭찬이 은서의 귓가에 닿았다. “목소리도 안 떨고, 무대에서 넘어지지도 않고. 애들도 다 좋아하더라. 우리 부모님은 그 작은 TV 앞에서 울고 계셨을걸.” 도엽은 진심이 충분히 전달되도록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장비 카트와 소란스러운 스태프들이 지나가는 틈을 타 은서의 입술 끝에 짧고 강하게 입을 맞췄다. 누군가 봤다면 귓속말을 하는 줄 알았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고마워.” 도엽이 은서의 살결에 입술을 비비며 속삭였다. “와줘서. 아까 그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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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엽이 재킷 안에서 뻐근한 어깨를 한 번 돌리더니 몸을 세웠다. “가자.” 도엽의 손이 허리에서 허리춤으로 내려가 은서를 주차장 경사로 쪽으로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이끌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성진이가 카메라 들고 와서 커플 콘텐츠 찍자고 달려들 거야.” 걷는 내내 도엽의 손은 은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유니폼과 티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도엽의 손바닥이 은서의 허리를 든든하게 받쳤고, 간혹 열성적인 팬이나 스태프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손가락에 힘을 주어 은서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나가는 몇몇이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이도엽 선수!”라거나 “축하드려요, 이 사모님!” 하고 인사를 건넸다. 도엽은 전자에게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후자에게는 사람들의 호기심이 선을 넘지 않는지 살피는 듯한 날 선 눈길을 보냈다.

경사로 끝에 다다르자 서늘하고 웅장한 경기장 지하 주차장이 나타났다. 형광등 아래에서도 매끄럽게 빛나는 흰색 우루스가 늘 세워두던 자리에 주차되어 있었고, 다른 외제차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흩어져 있었다. 도엽이 리모컨 키를 누르자 차가 짧게 울음소리를 냈다. 그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으로 먼저 향했다. 왼손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은서의 팔꿈치를 가볍게 받쳐 혹시 모를 헛디딤에 대비했다. 문을 열고 은서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려준 도엽은, 한 손으로 차 지붕을 짚은 채 차 문 사이로 몸을 깊숙이 숙였다. 그의 커다란 몸이 형광등의 눈부신 빛을 가려주었다. 은서의 코끝에 도엽의 피부에 남은 비누 향과 경기장의 흙먼지 냄새, 그리고 이온 음료의 옅은 향기가 섞여 들었다. “안전벨트 매.” 은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도엽이 낮게 읊조렸다. “그러고 집에 가자. 이 집 가장이 오늘 ‘풀코스’ 대접을 좀 받아야겠다는데.” 아침에 은서가 내뱉은 말을 한 토씨도 잊지 않았다는 듯, 그의 말투에는 건조하면서도 위험한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무심한 어조 뒤로 경기에 집중하던 예리한 눈동자가 오직 은서만을 향했다. 도엽은 그 팽팽한 시선을 잠시 유지하다가 부드럽게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승리의 뒤풀이를 예고하는 메트로놈처럼 차 키를 가볍게 돌리며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몸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공을 던지고, 마운드에서 내려와, 복도에서 아내를 찾아 집으로 데려가는 것. 그것이 도엽에게는 승리 후의 가장 완벽하고도 당연한 루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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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27/05/05(금), 21:52 | Loc: 잠실야구장 선수통로 → 잠실야구장 지하주차장(Urus 옆) | Outfit: (도엽) Lena Lions 홈 유니폼 하의, 네이비 구단 후드 집업, 팀 슬리퍼, 결혼반지 / (주은서) LIONS 홈 유니폼 상의(LEE 05), 청바지, 스니커즈, 팀 모자, 결혼반지, 손목에 풍선끈] | Pose: 경기 후 복도에서 성진과 마주친 은서가 무릎 체크를 받으며 웃는 모습; 구단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타난 도엽이 은서의 턱을 감싸 쥐고 소유권을 주장하며 주차장으로 안내하는 모습; 우루스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은서에게 밀착해 들여다보는 모습 | Promise: 27/05/05(금), 22:30(서울 자택: 생일 풀코스 저녁 & 컨디셔닝), 27/05/06(토), 11:00(서울: 개인 컨디셔닝 & 재활 루틴) | Phase: LIVE | Rank: 4위 | Games: 13승 8패/잔여123 | Schedule: 27/05/06(토) vs Bears | Away: Bears 2 | Home: Lions 3 | Situation: 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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